가훈(家訓)이란
가훈이란 한 집안 안에서 지켜지는 법도를 말한다.
가훈과 같은 말로 가계(家戒), 가규(家規), 가약(家約), 가법(家法)이란 말도 있다. 문중에서는 문규(門規, 혹은 宗規)가 있어서 종산(宗山), 제사답(祭祀畓) 같은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가훈은 가정의 어른을 중심으로 하여 가정안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재산을 지키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을 빛낼 수 있는 행동의 강령을 규정하되 이심전심으로 지켜지는 것이지, 글씨로 써붙여 이렇게 지키라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훈이 무르익어 가풍이 되면 전통있는 윤리규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사회의 핵은 이 가풍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건전하면 사회에 있어서의 법질서나 윤리질서도 건전할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논리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가훈(家訓)의 유래
가훈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오랜 것은 중국 북제 안지추의 안씨가훈부터이다. 당시 5호 16국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던 그는 자기 집의 전통을 지키고 입신, 치가의 법을 가훈으로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그 내용은 실로 다양해서 서치, 교자, 형제, 후취, 치가, 문장, 명실, 섭무, 성사, 지족, 제병, 양생, 귀심, 서증, 음사, 잡예, 종제 등의 20편으로 나뉘어 구체적이고 주밀하다. 송나라에 오면 주자(朱子)와 그 문인의 손에 이루어진 "소학(小學)"이 있다. 소학은 성현의 가르침과 가정윤리, 도덕, 군자의 일행을 모은 것으로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를 그대로 실행하면 성인이 될 수 있겠으나 일반에게는 너무나 높은 규범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모든 가훈을 모아 놓는다 해도 이 "소학"이 포용하고 있는 덕목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가훈(家訓)과 시대상황
환경과 시대에 따라 가훈은 변해야 하고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신라 김유신의 부인은 당나라와 싸워서 패배하고 돌아온 자기 아들 원술을 만나주지 않았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화랑정신(花郞精神)을 가훈으로 삼은 김유신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이 때는 우리나라에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살아 있던 시대였다.
그런가 하면 고려 이후에는 과거를 통하여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선민으로 등장한 선비 집안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성현의 가르침을 자제들에게 심어 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효의 대의로 삼았던 때라서 사대부(士大夫)사회 1,000년의 전통속에 많은 가훈이 생성되었다. 이것들은 대개 문집에 기아, 기녀 증 편지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우암 송시열의 〈계서녀〉는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간 딸을 위하여 쓴 것이다. 여기서 "가까운 사람에게 돈을 꿔주지 말며, 그 대신 네가 빛이 있으면 바로 갚아라"는 구체적인 가르침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가훈다운 점이다.
가훈(家訓)은 가문(家門)의 의지(意志)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성혁명을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은 은둔의 길을 택하면서 "벼슬하지 말라"는 비밀의 가훈을 남기어 당파에 따라 왕래조차 하지 않은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가훈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근검절약을 가훈으로 삼는 것은 가난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그 가난 가운데서도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근성의 소산이기도 하다. 남에게 아니꼬운 것을 보이기 싫다는 자존심과 굶어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가문에 대한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성실과 우애를 가훈으로 삼는다면, 사회에 대해서는 성실을, 가정내에 대해서는 우애를 지키려는 것이니 건설적인 가훈이라 할 수 있다.
생명있는 가훈(家訓)
가훈으로 삼을 수 있는 덕목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상 얼굴을 맞대고 사는 가정안에서 집안 사람에게 가훈을 일깨워 주려면 묵묵한 실천이 가장 값진 교훈이 될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당신 집안의 가훈이 뭐요?"라고 물어보면 '없다'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에 한 분은 근면, 성실, 실천, 관용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부모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에게 가르쳐 주셨고, 지금도 자기 아들, 딸들에게 순순히 타이른다는 것이다.
가훈의 교육은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제사지낼 때, 아헌을 끝내고 합문하고 난 다음의 시간이 가장 적절하다. 여기서 그 할아버지를 모셨던 어른이 다음 세대의 자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가정의 신화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 가정의 전통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가훈이란 남의 집 것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자기집 조상의 피와 살로써 체험하지 않은 가훈은 그 다음 세대에 대하여 설득력이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고전적인 가훈(家訓)의 현대적 조명
우리 사회는 집안의 일이 밖에 새어 나가기를 꺼렸던 때문인지 가훈이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책은 없다. 조선초에 엮어진 〈내훈(內訓)〉도 왕가의 부녀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나 일반 교훈서를 겸하였다. 그 밖에도 여범, 규훈 등으로 여자에 관한 것이 많이 있지만 이는 모두 시집가는 딸들을 위한 것이니 가훈이라 하기에는 미흡하나 그 근본은 자기집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가훈은 사대부들이 엮은 〈만록〉같은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말 이덕무의 〈사소절〉2권에서 서(序)를 붙여 "자기가 빈천한 선비이므로 여기에 옛날 현훈을 원용해서 잠경에 대비한다"하고 다만 이것은 신가의 법으로 할 따름이라고 낮추고 있으나 이에는 처세술을 겸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비의 가훈으로는 이를 넘어설 것이 없다고 본다. 여기에 나와 있는 덕목은 취사만 잘하면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도 가훈, 에티켓, 사훈 등을 얼마든지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대기업은 회사를 하나의 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설립자와 혈연적인 관계는 없다.
동경대를 나온 수재도 일단 입사하면 훈련기간을 거친다. 여기서는 화장실 청소부터 시킨다. 걸레로 변기부터 닦게 한다. 이것을 참고 견디는 사람만이 그 집안(회사)의 일원이 된다. 이것이 작건 크건 간에 일본의 상권이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훈이나 교훈이나 다 가훈의 원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가장이 방탕하면서 가족에게 아무리 근엄한 가훈을 내세워도 통할 리 없듯이 아무리 아름다운 사훈이라도 사장이 호화주택에 살고 그 행동이 엉망일 때, 그 회사는 번성할 리 만무할 것이다. 이렇듯 가훈이나 사훈은 가족이나 사원 전체가 동고동락하는 가운데서 하나의 피가 통하는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외국의 가정을 지키는 규율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구별하라 !" 독일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독일인들이 검소하며 일하기를 위해서 사는 국민이라는 것이 사실일까? 독일인들은 항상 시간을 엄수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정확하고 철저하고 냉담한가?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런 말들은 반은 사실이지만 선입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독일 가정의 어린이 방에 들어가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뭔가 좀더 정확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첫째 규율은 청결이고, 남자나 여자나 자유롭게 커야 한다는 것이 둘째 규율이며, 세 번째 규율은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이다. 독일 어린이들은 솔직하라고 교육을 받기 때문에 '예'나 '아니오'밖에 모른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어려서는 가족간에, 성장한 후에는 교사나 교사와의 사이에 불화가 자주 일어난다. 넷째 규율은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한다. 다섯째 규율은 자식이 독립심을 갖도록 키우며, 여섯째 규율은 부모는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어른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일 어린이는 어른들의 그런 잘못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한다.
잊을 수 없는 명가의 가훈(家訓)
우리집은 효자를 원하지 않는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보면 "우리집은 효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가훈이 실려있다. 이는 광해군 시대의 재상 정광필의 집 가훈의 한 토막이다. 그 때 사람들은 광필의 말이 비루하고 성현의 가르침에 거역한다고 비난하였고 이제 우리가 듣기에도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가훈이 나오기 까지에는 곡절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종때부터 부모가 돌아 가시면 삼년상을 치렀는데 이 때는 육식을 삼가고 죽을 마시며 묘하(墓下)에 여막을 짓고 이곳에서 삼년을 지내는 것이 禮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주가 삼년시묘를 잘 마치고 죽지 않으면 삼강행실 효자전에 기록되어 세인의 추앙을 받았던 것이었다. 따라서 평소에 호화스럽게 살다가도 한번 친상을 당하여 씨라기죽을 머고 삼년간 시묘의 예절을 마치자면 삼년이 지나는 동안, 또는 그 직후에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니, 그 예로서 당대의 영의정을 지낸 홍섬도 그러하였고, 유생 유극신도 그러하였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孝'의 그릇된 관념에 얽매인 나머지 가문의 번영과 발전은커녕 오히려 가문의 쇠망과 선조에 대한 불효를 가져올 불행한 일이 아닌가 ?
정광필은 이같은 누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혁명적 결단으로 이러한 가훈을 남기고 유몽인도 운연중 이를 시인하여 '자제를 위해 이 글을 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훈이 가정의 전통을 빛내고 나아가 국가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데 그 본의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토대 위에 지켜져야 하고 지나치게 경직되거나 구습을 묵수하는 폐단에 빠져서는 오히려 가문의 번영과 국가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나타날 수 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비해서 '孝'에 대한 현실적인 타당성이 있는 가치정립이 없이 다만 옛 사람이 믿어온 고정된 관념에만 충실하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부모상을 당한 아들이 영양실조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할지라도, 삼년동안 부모 잃은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전폐하고 시묘를 하여야 효자의 도리라는 것은 옛 시대의 인식일 뿐이다. 이 같은 누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정광필은 위와 같이 역설적인 가훈을 남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훈이 그 종교적, 역사적 배경에서 연유하여 독립지사의 가훈이 무엇보다도 민족정기를 드러내는 내용일 수 있듯이, 가훈은 그 집안의 전통과 문화 및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또한 항상 현실적 토대 위에서 신축성 있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해석되고 지켜져야 할 줄 안다.
[출처] 함종어씨 중앙종친회 - http://www.hamjong.or.kr/edasom/bbs/board.php?bo_table=d01&wr_id=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