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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씨(魚氏) 渡來(도래)의 沿革(연혁)

우리 조상님들께서 中國으로부터 高麗(고려)나라로 渡來(도래)하신 年代는 중국 南宋 代 寧宗과, 高麗代 明宗 年代가 겹치는 1195-1197年之間에 渡來한 것으로 簡單(간단)한 記錄(기록)만이 전하고 있는바 渡來의 背景(배경)이나 經緯(경위)에 대한 詳細(상세)한 기록은 없으니 確實(확실)한 理由(이유)를 說明(설명) 하는 데는 分明한 限界(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나 그럴수록 合理的(합리적)이고 論理的(논리)인 妥當性(타당성)을 바탕으로 한 설명을 類推(유추)해야할 것이다.
始祖로부터 七世이신 中郞將(중랑장)까지는 生沒年代(생몰연대)를 알지 못한다.
八世이신 典客署令公(전객서령공) 부터는 生沒年代(생몰연대)가 紀錄(기록)돼 있으니 그나마 未知(미지)의 年代를 追跡(추적)하는데 決定的인 端緖(단서)가 되고 있다.
八世祖 署令公의 沒年(몰년)은 1328년이다. 그러면 1195년부터 1328년까지 약132년동안에 8세가 살아왔다면 大略(대략) 世代當 16.5년밖에 않된다. 그러나 萬若(만약)에 始祖부터 三世까지 한배를 타고 오셨다면 그리고 三世께서 20전후의 長成한 靑年이였다면 26.4세가 된다.
왜 이와 같은 追論(추론)이 可能한가 하면 記錄에 三世이신 振明(진명) 振升(진승) 兄弟분은 以文吏懸(이문이현)이라 했으니. 學文(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친 官吏(관리)였다는 짧은 記錄인바.示唆(시사)하는바 대단히 크다,
흔히 간단하게 생각하는 대로 始祖께서 單身(단신)으로 高麗(고려)에 오셨다면 當代(당대)에 戶長同正이라는 만만찮은 벼슬을 除授(제수)받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三世인 振明(진명). 振升(진승). 兄弟분은 宋나라에서 相當(상당)한 學文(학문)을 이룬 뒤 오셨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後代에 살고 있는 우리는 先代에서 해놓은 記錄(기록)을 中心으로 살펴 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疑問(의문)이 가는 部分(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解釋(해석)을 해 볼 必要가 있다.
첫째, 族譜(족보)를 보면 始祖(시조)께서 “南宋時 避難東來 初接於江陵”(남송시 피난동래 초접어강릉) 대개“南宋(남송)때 亂난)을 避(피)해서 高麗(고려)나라로 오셨으며. 처음엔 江陵에 이르셨다“고 쓰셨는데. 우리는 너무 避難(피난)해 오신 것만으로 斷定(단정)해 왔다. 그러나 그 당시 宋나라의 國家的(국가적). 社會的(사회적) 背景(배경)으로 미루어 內陸에 있는馮翊(풍익)으로부터 수천리 황해바다에 이르는 險路(험로)를 冒險(모험)해 가며 또 黃海(황해) 바다 거친 물길을 건너 高麗(고려)까지 와야 할 만큼 切迫(절박)하고 緊急(긴급)한 戰爭(전쟁) 狀況(상황)이 避難(피난)길을 서둘러 떠나야 할 만큼 深刻(심각)했었느냐 하는 것은 分析(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避亂(피란)하면 전쟁을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살던 곳 풍익땅이 전쟁의 소용돌이로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워 살만한 곳을 찾아 왔다는 얘기가 되는데 事實은 馮翊땅에서 黃海바다가 있는 곳 까지 가는 經路의 어려움이 馮翊에서 亂을 避하는 일 보다 數千倍는 더 危險하고 힘든 일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金나라의 侵入에 의한 戰爭을 피하는 일보다는 훨씬 次元이 다른 理由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宋의 左使인 魚石이 楚 恭王의 提議를 受諾하여 彭城의 諸侯로 있을 때. 宋의 平公이 다시 彭城을 侵攻하여 城主인 魚石을 죽이고 彭城을 宋에 歸屬시켰는데. 그때가 BC572년의 일이 였으며. 彭城을 脫出한 魚氏 一族은 生存을 위해 雁門 풍翊으로 갔던 것이 馮翊 生居의 始作이였다면. 약1770여년 살아온 故鄕을 떠나는 일이 어찌 가벼운 判斷으로 實行할수 있는 일이였겠나!.

송나라는 後周(후주)의 將帥(장수)로서 거란족 토벌의 큰 공을 세운 뒤. 정권을 장악한 趙匡胤(조광윤)이 960년 후주의 恭帝(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를 稱(칭)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무관이 권력을 잡았을 때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극단적인 崇文背武(숭문배무)정책을 편다.
무관을 멀리하고 문신을중용하여 문치에 기을다 보니 문화는 中國歷史(중국역사)를 대표할 만큼 隆盛(융성)發達(발달)한 반면, 文弱(문약)해진 政權(정권)은 新興北方勢力(신흥북방세력)으로부터 거듭 밀려나 9代 欽宗(흠종)(1127)은 金나라에 의해 被殺(피살)되면서. 都邑(도읍)인 卞京을 抛棄(포기)하게 된다. 欽宗의 아우 가 臨安 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가 南宋으로서 高宗(고종)이다.
以後 에도 국방은 外交力으로 겨우 領土를 支撑(지탱) 保存하는 것 이였으나 平和와 文治主義의 확립은 학문이나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를 탄생시키게 되니 北宋의 周敦이 등으로 비롯하여 남송의 朱子에 이르러 중화주의적인 世界觀(세계관)과 道德觀(도덕관)을 完成(완성)시키니 朱子學의 誕生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革命的인 哲學思潮(철학사조)로서 保守的(보수적)인 旣得權(기득권)세력으로부터 極甚(극심)한 彈壓(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權力(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韓?胄(한탁주)등은 朱子學을 僞學(위학)이라 규정하고 이 學問에 同調(동조)하는 學者 선비 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니 1195년 韓?胄(한탁주)는 黨禁法(당금법)을 宣布(선포)하여 朱熹(주희)는 벼슬을 剝奪(박탈)당하고 그를 追從(추종)하는 많은 學者 선비들이 或은 極刑(극형)을 당하거나 또는 流配(유배)되는 지경에 이르러 성리학에 심취하여 이를 眞學으로 理解(이해)하는 선비들은 亂世(난세)를 避(피)하여 깊은 곳에 隱遁(은둔)하거나 宋을 脫出(탈출)하게 된다.

우리 시조이신 화인 할아버지께서는 그 조상이 宋나라의 임금이던 平公4년(BC572) 諸侯(제후)로 있던 彭城(팽성)을 脫出(탈출)하여 馮翊(풍익)땅에 자리 잡아 살아온 1760여년의 오랜 世居地(세거지)를 떠나 낯선 땅로 간다는 것이 어찌 單純(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할수 있는 일이였겠나!
사람이 한 地域(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면 그 오랜 歷史만큼 種族(종족)은 많이 늘어났을 것이고. 또한 莫大(막대)한 財産(재산)을 蓄積(축적)하고 살았을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王族(왕족)으로서의 自尊心(자존심)과 많은 財産을 保有(보유)하고 사는 家門(가문)이라면 西安(서안)을 중심한 中國最高(중국최고)의 文化의 中心에서 결코 邊方(변방)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類推(유추)하는바. 中國歷史(중국역사)에 첫 손 꼽히던 長安巨富 魚翁叔(장안거부 어옹숙)의 逸話(일화)가 어찌 남의 이야기 일수 있겠나. 長安에서 馮翊(풍익)에 이르는 平野(평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칠백리 벌판이라고 했다. 農業(농업)이 産業(산업)의 全部(전부)이던 時節 이와 같은 大平野(대평야)를 背景(배경)으로 그 中心에서 數十代(수십대) 代물려 살며 살아온 家門(가문)을 先導(선도)하던 人物(인물)이 그 고장을 떠나 高麗(고려)로 가겠다는 決心(결심)을 하는 데는 兵難(병난)을 피해 故鄕(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理解(이해)하기 어렵다. 자기가 確信(확신)하는 學問(학문)과 思想(사상) 그리고 哲學(철학)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選擇(선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渡來(도래)한 理由(이유)나 方法(방법)이 풀린다. 黃河江 數千里(황하강 수천리) 물길을 타고. 또 黃海(황해)바다 茫茫大海(망망대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充分(충분)한 穀食(곡식)과 財物(재물)과 書冊(서책=지식)을 잔뜩 싣고. 食率(식솔)들 모두 한 배에 태우고 오셨을 것이다. 최소한 三代쯤은 같이 오셨을 것으로 類推(유추)한다. 그 쯤 돼야 처음 발 딛는 高麗(고려)나라에서 歡待(환대)받으며 벼슬을 除授(제수)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忽忽單身(홀홀단신) 초라한 避難民(피난민)으로 他國(타국)에 왔다면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우선은 남의 집 머슴살이도 어려웠을 터인즉! 三世이신 振名(진명) 兄弟(형제)분의 以文吏顯(이문이현)의 疑問(의문)도 自然(자연) 풀린다. 그리고 高麗 末葉(고려 말엽) 나라의 國法(국법)이 混亂(혼란)하여 父母喪(부모상)을 당하여도 禮(예)를 지켜 葬事(장사)지내는 일조차 모르던 시절 朱子家禮(주자가례)를 지켜 葬事(장사)모시는 일 이라던지 代물려 三年侍墓(삼년시묘)를 徹底(철저)히 實踐(실천)하는일 등은 高麗社會(고려사회)에서는 구경 할수 없던 일로 서. 오직 이 家門(가문)에서 代물려 施行(시행)해 오던 喪禮(상례)나 祭禮文化(제례문화)는 必是(필시) 始祖(시조)로부터 傳來(전래)해 오는 固有(고유)의 文化(문화)였을 것으로 自負(자부)한다.

七世祖이신 中郞將 遵亮公(중랑장 준양공)께서 晉州(진주)로 처음 옮겨 사셨는데. 六世祖 以前의 仔細(자세)한 記錄(기록)은 傳(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살펴볼 길이 없고. 단지 諱字(휘자)와 官職(관직)만이 記錄(기록)돼 傳(전)해지고 있으나. 七世祖(칠세조)께서 살아오신 삶속에는 그 以前 先祖(이전 선조)어른들의 家風(가풍)이나 思想(사상)이 녹아 스며있었을 것으로 當時(당시) 高麗人(고려인)들의 生活(생활)과는 確然(확연)히 다른 面을 보여준다. 人間生活(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變化(변화)를 拒否(거부)하는 것이 곧 冠(관). 婚(혼).喪(상).祭(제)의 禮法(예법)이다. 高麗(고려)는 周知(주지)하는 바와 같이 佛敎(불교)를 國是(국시)로하여 五百餘年을 이끌어온 佛敎國家(불교국가)였다. 그와 같은 國家(국가) 또는 社會雰圍氣(사회분위기) 속에서 惟獨(유독) 우리 家門(가문)만은 儒敎法度(유교법도)에 따른 喪禮(상례). 祭禮(제례)를 固執(고집)하여 實踐(실천)해 왔다는 것은 대단히 重要(중요)한 일로서 始祖以來(시조이래)의 家法(가법)으로 傳承(전승)돼온 儒敎文化(유교문화)의 繼承實踐(계승실천)으로 당시 紊亂(문란)하고 混濁(혼탁)한 社會(사회)에서 唯一(유일)한 模範(모범)으로 庶民(서민)은 勿論(물론)이고 士大夫(사대부). 兩班(양반). 선비들에게 미친 影響(영향)은 대단히 컸던 것으로 특히 喪禮(상례)나 祭禮(제례)에있어 가장 高級(고급) 선비들이 따라할 수 있는 儒敎文化(유교문화)의 實踐(실천)으로 父母님 喪(상)을 당하면 例外(예외)없이 부모님 산소옆에 草廬(초려)를 치고 三年侍墓(삼년시묘)를 사는 制度(제도)는 高麗(고려)에는 없던 일이였다.
慶南 固城郡 馬巖面 頭浦里 侍墓洞(경남.고성군.마암면.두포리.시묘동)은 옛날 祖上(조상)님들이 사시면서 父母님 산소옆에 草廬(초려)를 치고 삼년동안 侍墓(시묘)를 사셨던 고장으로. 隣近(인근)의 住民(주민)들이 이분들의 至誠(지성)으로 모시는 孝(효)의 實踐(실천)하는 모습에 敬畏(경외)하는 마음으로 尊敬(존경)하고 追從(추종)하게 되니. 나라의 法度(법도)를 바르게 하는 맑은 샘물 같은 家門(가문)으로 稱誦(칭송)하게 됐으며. 그 精神的傳統(정신적전통)은 오늘날 까지 이어저 오는 속에. 그 고장은 侍墓洞(시묘동)이라 이름하여 七百餘年을 불리어 오고 있다.
父母님 喪을 치루시고 三年侍墓(삼년시묘)를 살고도 마음이 모자란 듯 지으신 이 詩는 지금 읽어도 마음이 시리다. 月亭公(월정공)은 始祖(시조)로부터 十世孫(십세손)이 되신다. 先考(선고=아버님)이신 左尹公(좌윤공)께서는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 14년(1365)에 卒(졸)하셨으니 이 詩(시)는 1365년쯤에 지으신 것.

공의 諱(휘=돌아간 어른의 이름))는 淵(연)이고 雅號(아호)는 月亭(월정). 直提學公(직제학공)의 父親(부친)이시다. 月亭公(월정공)은 십구세에 生員(생원)이 되셨고 20세때 父親(부친)인 左尹公(좌윤공)(諱 伯游)이 別世(별세)하시자 文公家禮(문공가례)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喪禮(상례)를 치루시고. 三年동안 侍墓(시묘)로 精誠(정성)을 다하니 果然(과연) 純孝(순효)의 家門(가문)이라 稱誦(칭송)이 높았으며. 이 家門(가문)이 行하는 家禮(가례)가 模範(모범)아 되어 모두 따라 하기를 자랑으로 하였다 한다.

居廬志哀 거려지애 여막에 있으면서 슬픔을 쓰다
守殯年來笑未開. 수빈연래소미개. 무덤을 지키면서 웃음 한번 없었는데.
肺中氷炭兩相堆. 폐중빙탄양상퇴. 가슴 속은 아직도 숱덩이처럼 녹지않고 쌓였는데.
朝來暮往問潮水 조래모왕문조수. 조석으로 오고가는 조수물에 묻노니.
胡乃爺孃去不廻. 호내야양거불회. 어찌하여 부모님은 한번 가곤 못오시나?

大祥日作 대상일작 대상날 쓴 시
三年塚上侍嚴君 삼년총상시엄군 삼년동안 무덤에서 아버님 모셨는데.
朝暮空山伴白雲 조모공산반백운 아침 저녁 빈 산에선 흰 구름을 벗 하였네
심통미추상제진 아픈 마음은 그대론데 상제는 다 했구나.
顔瞻垂淚出柴門 안첨수루출시문 눈물로 바라보며 여막문을 나선다.

월정공의 시를 評한 어느 詩人의 表現을 빌면. “그 어른의 시는 마치 조용한 湖水에 잔 바람을 이고 살랑거리는 실물결 같다” 라고 極讚(극찬)을 한다. 月亭公께서 卒 하셨을 적에 아드님의 親舊(친구)분들이 問喪次(문상차) 오셔서 故人(고인)의 文章(문장)과 思想(사상)을 追慕(추모)하며 글을 지었는데. 특히 월정공의 侍墓詩 두수에 次韻(차운)한 文章이 남겨저 있다.

옛글에 대개 시를 짓는 것은 아픈 마음이 사물에 감동되는데서 출발하여지은 것이 많은데 공의 시 중에 첫구절은 素冠 편에 이른바, “여위고 초췌해진 몸(兢人落연兮)을 일컬은것이며 아래 구절은 육莪편에 이른바 ”회오리바람 몰아친다“(飄風發發)를 표현한 것이다. 그 시를 생각하니 구차히 옛 사람들의 본을 뜨려함이 아니였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말씀을 나타내면 시가되는데. 대개 선생의 ”조수의 느낌“과 ”빙탄의 아픔“은 또한 옛 사람과 뜻이 같고 기운이 합처. 期約하지도 않고 자연히 일치된 것이다. 내 면곡과는 오랜 친구로서그 뜻을 깊이 이해하며 사는지 오래되었다. 선생의 뜻은 어버이 상을 당하여 終天之痛을 잠시도 잊어본적이 없었으며 삼년의 상기를 駟過隙(사과극)이나 새가 눈앞을 휙 지나가듯 삼년의 상기가 마음속으로는 모자라기만 하니. 반드시 몸을 숙여 끝냈으리라. 그러므로 그 시를 짓는 뜻이 참으로 이와 같았으리라. 내 이처럼 잠시 그 시를 차운하여 선생의 애통해 하신속마음을 적어 보노라.

이른 새벽과 황혼녘에 拜掃하고 祠堂 문을 여니. 맹렬한 추위에 남산에는 눈이 쌓이고,
평생토록 효도를 잘 하려는데 세월은 빨라. 어찌 삼년이 꿈결 같음을 견딜수 있으리요.
前 府丞 吳一德이 삼가 지음

삼년 상이 끝나 빈소 문이 닫혀. 촛불과 향연만 희미한데. 枕塊하고 밤이 다 하도록 꿈도 꿀 수 없어.
어버이 생각에 두 눈에서 눈물만 가득하도다.
前 府升 完山通判 金可成 삼가씀

조용하고 외진 산골에 길이 나니. 깊숙이 자리잡은 묘문에 비구름이 끼고. 갈가마귀도 흙을 나르는데.
솔은 사슴이 떠맏다 돌아 오는 소리 못 듣느냐
前 府丞 인 金律이 삼가 지음

뭇 산이 바다로 뻗고 바다는 문처럼 열려. 어버이 무덤에 흙을 날라 封墳이 생기니
(한 구절 빠짐) 날마다 조수물 돌아옴을 헛되이 보노라.
郊隱 鄭以吾

입가에 웃음 어찌 나타내지 않으셨던고. (한 구절 빠젔음)
그 해의 내 아버지 사정을 어찌 알수 있으리오만. 우리 형제들이 도로 따르게 됨을 보시게 되리라.
아들 직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