魚字를 姓으로 쓰는 姓氏는 셋이 있는데.
1) 慶興魚氏 : 魚繼福을 始祖로 肅宗朝에 賜姓을 받아 慶興에 定着하여 살며 慶興을 貫鄕으로 하니. 慶興魚氏가 됐으며, ~85년 國勢調査때 人口53명으로 登錄돼있음,~
2) 忠州魚氏 : 高麗太祖때 池重翼이라는 분이 高麗開國의 元勳이 됐는데. 그의 겨드랑의 비늘이 있음이 유명했던 듯. 王建太祖가 이를 알고 “몸에 有鱗하니 必是 고기라”며 魚氏로 賜姓하니 忠州池氏에서 分籍하여 忠州魚氏의 始祖가 됐다. ~85년조사때 3503명으로 조사됐음~
3) 咸從魚氏 : 우리의 始祖이신 化仁 公께서는 中國 宋나라 15대 임금인 寧宗때와. 高麗19대(1170-1197)明宗조가 겹치는 1195-1197년지간에 宋나라로부터. 高麗나라로 오신 것으로 記錄돼 있으니. 우리 咸從魚氏의 淵源을 알기 위해서는 中國의 古代史를 먼저 理解할 필요가 있다,
中國의 歷史는 三皇 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三皇은 伏羲(복희)씨. 女蝸여화)씨. 神農(신농)씨.로 三皇을 치기도 하고. 天皇씨. 地皇씨. 人皇씨로 기록되기도 하며 그 외에 다른 說도 있다,
史記의 著者 司馬遷(사마천)은 中國歷史(중국역사)에서 三皇時代(삼황시대)는 神話時代(시화시대)라 하여 잘라 버리고. 五帝本紀로부터 歷史로 기록하고 있다.
五帝란 황제(黃帝). . 제요(帝堯). 제순(帝舜)을 말한다.
黃帝는 有熊國(유웅국)의 임금 少典(소전)의 아들로서 나면서부터 신령스럽고 총명하였으며 나이가 들어 장성하매 더욱 사람들의 촉망과 신임을 받아 백성을 안락하고 평화롭게 다스리니 태평한 세상을 누리게 된다,
黃帝의 시대가 지니자 中國의 역사는 原始的 氏族 共同體(원시적 씨족공동체)가 무너지고 奴隸制度(노예제도)가 싻트기 시작하여. 階級(계급)이 없던 사회로부터 계급이 있는 사회로 이행하는 大變革(대변혁)의 시대로 들어선다.
黃帝(황제)가 죽고 堯(요)임금이 天子가 되어 나라 이름을 唐(당)이라 했고, 舜(순)임금이 堯임금의 뒤를 이어 天子가 되고 나라이름을 虞(우)라 했다.
“史記”에는 堯임금의 사람됨을 “그의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산과 같았다. 백성들은 그를 해처럼 따랐고 구름처럼 바라보았다. 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너그러웠다” 라고 기록하고있다.
이렇듯 堯임금은 총명하고 인정 깊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고 백성들을 어린 자식을 돌보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니 백성들은 모두 激昻歌(격앙가)를 부르며 太平盛世(태평성세)를 한껏 謳歌(구가)하며평화로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았다.
堯임금이 제위에 오른지 70여 년. 세상은 변함없이 평화로웠으나 7년동안이나 계속되는 洪水로 黃河(황하)강물이 넘처흘러 中國天地가 온통 떠내려 갈듯하니. 요임금은 물을(治水)다스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急先務로 치고 治水의 책임자로 (곤)을 등용하였으나 9년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니 “天下를 맡길만한 훌륭한 인재를 구한다” 선포하기에 이른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최종적으로 후보에 오른 사람이 舜(순)이었다.
舜은 의 6세손으로 그이 아버지는 頑惡(완악)하기로 유명하여 再婚한 후처와 더불어 온갖 악행을 다 하는 많은 일화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순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니 그 소문은 중국에 가득하였고 드디어 堯임금에게도 알려지게 된다.
堯임금에게는 蛾黃(아황)과 女英(여영)이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이들은 눈만 뜨면 서로 쥐어뜯고 싸우는 바람에 堯임금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다니. 이 두 따님을 舜에게 시집보내고 이들 부부사이를 살펴보니 시집 간지 그 이튿날부터 서로 밥을 떠 먹일만큼 달라진 것이다. “君子의 道는 夫婦로부터 始作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는 堯임금으로서는 지극히 만족하며 舜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요직에 등용한다.
舜은 20세에 효행으로 유명해 젔고. 30세에 登用되고. 50세에 攝政(섭정)이 되었으며. 58세 때 堯임금이 죽자 61세 때 正式으로 帝位에 올라 39년 동안 在位하였다.
舜의 治世도 堯임금 때에 못잖은 太平聖代를 謳歌(구가)하였으며 禹. 皐窯(고요)등 어진신하들이 舜을 도와 더욱 빛나는 정치를 실현하였다. 특히 堯임금 때부터 정치에 있어 최대의 목표로 삼아왔던 黃河를 다스리는 치수사업을 鯤(곤)의 아들 禹에게 맡기는데. 그 결과 탁월한 지혜와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치수사업에 성공을 거둔다. 이후 중국대륙에 대홍수로 인한 피해를 면 할수있게 되었다.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에서 禹의 功績(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仔細(자세)한 글을 남겼다)
禹 임금은 堯임금때 治水事業(치수사업)에 실패하고 死刑당한 鯤(곤)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이룰 수 없었던 치수사업을 방법을 달리하여 대성공을 걷우게 된다.
鯤은 제방을 쌓아 물이 넘치지 못하게 하는 方法이였던 반면. 우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물길을 파는 방법을 사용하여 성공을 거둔다. 治水事業의 성공이야말로 중국의 역사의 물길을 정리한 대사업이었으며 그 일로하여 禹는 舜임금의 代를이어 중국 天子의 位에 오른다.
禹의 뒤를 이어 禹의 아들 啓(계)가 帝位에 오른다. 여태까지는 天子가 어진 인물을 골라 제위를 물려주는 이른바 禪讓(선양)의 방법으로 제위가 계승되었으나. 禹의 아들 啓에 이르러 이 禪讓(선양)의 체제가 무너지고 세습의 방법으로 바뀌어 夏王朝(하왕조)가 中國歷史(중국역사) 最初(최초)의 帝國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夏王朝(하왕조)는 禹帝(우제)를 始祖(시조)로하여 400여년에 걸처 중국역사에 君臨(군림)하였다.
禹王(우왕)의 5세 少康代(소강대)에 이르러 夏王朝는 크게 繁盛(번성)한다. 少康의 11대 天子로 傑(걸) 이라는 惡名높은 天子가 제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후대의 殷나라 紂(주)와 함께 惡逆無道(악역무도)한 군주의 標本(표본)으로 상징되는 暴君(폭군)이다.
竹書紀年(죽서기년)에는 夏王朝(하왕조)의 存續年代(존속연대)를 禹왕부터 桀(걸)왕까지 472년 이라 하고. 禹王(우왕)을 제외하고 16帝 13대로 기록되어 있다.
桀왕은 天子로서 지녀야 할 덕은 닦으려 하지 않고 荒淫無道(황음무도)에 치우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구든 마구 죽이고 虐待(학대)하기를 다반사로 하였으며 술잔에 술을 따라먹는 것 조차 귀찮다 하여 못 을파 술로 채우고 고기를 구어 숲을 꾸미게 하고는 진탕 먹고 즐기는 일을 즐기니 酒池肉林(주지육림)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으며. 패망의 길을 자초하여 夏 왕조는 망하고 만다.
1. 天子는 하늘의 代理人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役割(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 天子다. 暴惡(포악)한 하늘은 없다. 無道(무도)한 하늘도 없다. 帝王이 暴惡(포악)하고 無道(무도)하다면 이미 天子로서의 자격을 抛棄(포기)한 인간으로 墜落(추락)하게 되며.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仁慈(인자)하고 寬大(관대)한 賢人(현인)에 의해 쫒겨나게 된다. 夏朝(하조)의 桀帝걸제)는 이렇게 失德(실덕)한 帝王으로 쫒겨나고. 新興(신흥) 殷(은)나라의 湯帝(탕제)에 의해 멸망한다.
殷(은)의 湯王(탕왕)은 덕이 높은 인물로서 名宰相(명재상) 伊尹(이윤)의 協力으로 殷王朝(은왕조)를 세우고 王道政治(왕도정치)를 편다. 湯帝(탕제)가 세운나라의 이름은 商(상)이였으나. 20대 반경이 殷墟(은허)로 都邑(도읍)을 옮긴 후는 殷(은)나라로 부르니 殷(은)과 商(상)은 같은 나라로서 다른 이름이다. 은나라의 國姓(국성)은 子氏 이다.
殷나라는 湯王이 개국한 이래 약550년. 31세의 繼代(계대)를 이어 오다가 제국의 말년에 이르면 의례 狂暴(광폭)한 왕이 백성을 괴롭히는 폭정을 하는바 殷의 말년도 前朝와 다르지 않다
紂(주)의 父王은 子乙인데 그는 세 아들이 있었다. 長子인 微子啓(미자계) 와 둘째 仲衍(중형)이 있었는데 그의 어미가 正妃가 되기전에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삼자인 子辛이 帝位를 잇게 된다.
紂王은 酒色(주색)에 浩蕩(호텅)하고 특히 ?己(달기)를 미친 듯 사랑하여 이로 인해 나라를 망친다.
은왕조의 여러 충신들은 멸망해가는 殷王朝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紂王(주왕)에게 여러차 諫(간)했으나 듣는척도 않고 더욱 정치는 苛酷(가혹)해지자 모두 왕의 곁을 떠나 자취를 감춘다.
은나라는 周의 武王에 의해 문을 닫게되니
紂王의 난정을 피하여 隱遁(은둔)해 있던 紂王(주왕)의 형. 微子啓(미자계)에게 백성들이 몰려가 指導者(지도자)가 돼 줄 것을 懇請(간청)하기에 이르러 王이되니 宋(桀宋)의 시조가 된다.
殷(은)나라가 망한 년대와 宋이 開國(개국)한 年代는 同一한 년대인 BC1112년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드는 때이다.
당시 中國大陸에는 1700여개나라가 亂立(난립)하여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시대가 9백수십년의 戰亂(전란)을 거치며 120여개나라로 줄었다가 마침내 齊(제). 魯(노). 鄭(정). 宋(송). 曺(조). 晉(진). 楚(초). 陳(진). 蔡(채). 燕(연). 衛(위). 秦(진).등12나라로 압축되어 天下統一을 향한 眞劍勝負(진검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혹은 戰爭(전쟁)을 통한 武力으로 혹은 合縱連橫(합종연횡)으로 勢力(세력)을 키운다. 이때 유력한 강대국을 春秋五覇(춘추오패)라 稱(칭)하는데. 齊(제)의桓公(환공). 晉(진)의 文公(문공). 楚(초)의莊王(장공). 宋(송)의襄公(양공). 秦(진)의穆公(목공).을 치는 것이 定說(정설)로 친다.
春秋時代(춘추시대)라는 名稱(명칭)은 孔子가 魯(노)나라의 歷史記錄(역사기록)을 基本(기본)으로 해서 編纂(편찬)한 春秋(춘추)에서 由來(유래)한것이고. 戰國時代(전국시대)라는 名稱(명칭)은 前漢末期(전한말기)의 劉向(유향)이 편찬한 戰國策(전국책)에서 由來(유래) 한다.
周의 제13대 平王이 洛陽(낙양)으로 都邑(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시대를 西周時代(서주시대)라 하고, 도읍을 옮긴때부터 37대 ?(난)왕이 秦(진)나라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의 514년간을 東周(동주)시대라 하며. 이 東周時代(동주시대)를 다시 春秋時代(춘추시대)와 戰國時代(전국시대)로 나눈다. 春秋時代는 平王이 都邑(도읍)을 옮기던 기원전 770년부터 晉나라 대부위사 .조적. 한건이 그들의 라이벌인 智佰(지백)을 없애고 그 땅을 3분한 후 諸侯(제후)로 封(봉)함을 받은 紀元前 403년까지의 368년간을 말하고. 戰國時代(전국시대)란 春秋時代(춘추시대)이후 晉(진)나라가 天下를 統一한 紀元前 221년까지를 말한다.
殷(은)의 紂王(주왕)이 周(주)의 武王(무왕)에 의해 亡했을 때. 殷(은)의 流民(유민)들이 紂王(주왕)의 兄인 微子啓(미자계)를 推戴(추대)하여 王位에 오르니 宋의 始祖(시조)가 된다. 따지고 보면 殷나라는 亡했으되 微子啓(미자계)에 의한 宋나라는 殷(은)나라의 延長(연장)으로 봐도 틀림이 없다. 宋(송)나라의 國姓(국성)도 子氏이다. 紂王(주왕)의 兄이 王統(왕통)을 이어 宋을 세웠으니 나라의 이름은 비록 殷으로부터 宋나라로 됐으나. 子氏王朝(자씨왕조)의 承繼(승계)로 王統(왕통)은 이어지고 있는 것.
微子啓(미자계)가 建國(건국)한 宋(桀宋걸송)은 이후 좋은 정치와 밝은 외교로 나라를 잘 다스려. 19세환공에 이르러 政治(정치)는 安定(안정)되고 國勢(국세)는 富强(부강)해 젔다. 春秋時代(춘추시대)인 周(주)나라 襄王(양왕)2년(BC650) 宋나라 桓公(환공)이 卒하였다. 桓公이 病席(병석)에 있을 때 太子인 玆甫(자보)는 仁德(인덕)이있는 庶兄(서형) 子魚(자어)에게, 太子의 자리를 讓步(양보)하려 했으나 子魚는 굳이 辭讓(사양)한다. 그래서 玆甫(자보)가 王位에 올라 襄(양)공이 됐으며 子魚(자어)는 宰相(재상)에 任命됐다.
그로부터 7년후(BC643), 春秋(춘추)의 첫 覇者(패자)인 齊(제)나라 桓公(환공)이 죽고. 宋나라에는 隕石(운석)이 떨어졌다. 이는 覇者(패자)가 될 徵兆(징조)라며 襄公(양공)은 野望(야망)을 품기 始作했다. 그는 齊(제)나라를 처들어가 公子 昭(소)를 세워 追從勢力(추종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뒤 宋(송).齊(제).楚(초).세나라의 猛主(맹주)가 되었다. 子魚는 작은나라가 覇權(패권)을 다투는 것은 큰 禍根(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襄公은 자기를 무시하고 楚나라와 通交한 鄭나라를 첬다. 그러자 그 해 가을 楚나라는 鄭나라를 救援하기위해 大軍을 파병했다. 襄공은 楚나라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敵軍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子魚는 참다못해 進言한다. “적은 많고 我軍은 적고 弱勢이오니 적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처야 합니다” 그러나 襄公은 듣지 않았다.“君子는 어떤 경우든 남의 弱點을 노리는 卑怯(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요” 襄公은 楚나라군사가 戰列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攻擊命令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한 宋나라 軍士는 大敗했고 襄公 자신도 허벅다리에 負傷을 입고 그것이 惡化돼 그 이듬해 죽고만다.
宋나라사람들이 襄公을 원망하자. 양공이 對答한 말을 “春秋左傳”에는 이렇게 記錄하고 있다. “君子는 負傷者를 攻擊하지 아니하며. 늙은이는 捕虜로 하지않는 법이다. 좁은 峽谷이나 江가운데서 敵이 不利한 形勢를 이용해서 이기려 하는 것은 옛 어진사람들의 取할바가 아니다. 내 비록 亡國의 後裔지만 隊伍를 整備하기 전에 攻擊命令을 내리는 그따위 恥事한 짓은 하지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子魚는 歎息하였다.
“兵法이란 이기는 것을 目的으로 삼는다. 戰爭에서는 無條件 이겨야 한다. 君子는 負傷者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다면 애당초 戰爭을 벌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
史書에는 襄公의 理想主義를 “宋襄의 仁”이라고 비웃었다.
宋 桓公의 長子이며 襄公의 兄인. 公子 目夷의 字가 子魚이며. 그 아들이 公孫友. 손자가 이니. 이때에 이르러 祖父의 字로 姓을 삼은 최초의 魚氏 姓이 시작이 된다. 그리고 目夷 子魚이래 宋 王室의 最側近王族으로 또. 가장 높은 職位에 있으면서 代代로 王權을 左之右之하는 地位에 君臨한다.
宋의 襄公이 즉위 13년에 卒하니. BC637년의 일이다. 襄公의 長子 子王臣이 登極하니 成公이다. 宋 成公 元年에 秦나라에는 文公이 登極하는데. 成公과 文公은 同盟의 關係에 있으면서 서로 돕는다. 成公4년 BC633년에 楚의 成王이 처 들어오니. 秦 文公에게 救援을 請하여 楚의 侵攻을 擊退한다. 성공17년에 왕이 죽으니. 아우 子禦 가 태자를 죽이고 왕이되고자 하나 등이 자어를 죽이고. 成公의 어린아들을 登極케하니 昭公 이나. 昭公이 無道하여 9년만에 쫒겨나고 아우 鮑革이 王이되니 文公이다. 文公이 22년만에 죽고. 아들 子瑕가 임금이 되니 共公이다..共公이 13년만에 죽었을 때. 華元이 右師가 되고. 魚石은 左師로 있을 때였는데. 史馬唐山이 太子 肥를 죽이고 華元마저 죽이려할 때. 魚石이 唐山을 죽이고 共公의아들 子成을 登極 토록하니 平公이다.
平公3년(BC573년) 楚의 共王이 宋의 彭城을 攻擊해. 빼앗은 땅을 宋의 左師인 魚石을 諸侯로하여 封한다. 魚氏의 悲劇은 여기부터 始作이된다..
宋나라에서는 切齒腐心 楚에 빼앗긴 彭城을 되찾기 위해 死力을 다해 싸워 彭城을 되찾고는 諸侯 魚石을 죽이고 事態를 平定한다.
宋나라의 桓公이래 대대로 宰相의 地位를 世襲하여 100여년간 權勢를 누려오던 魚氏 家門은. 여기서 皇室과의 뿌리 깊은 因緣은 끝나고 만다. 猝地에 송나라에서 쫒겨난 一族은 生存을 위해 雁門. 馮翊등지로 흩어지는 것 으로 기록되고 있다.
紀錄上(기록상)으로 보아 BC573년 이후. 始祖(시조)께서 高麗(고려)로 오신 AC1196년 之間(지간)의 詳細(상세)한 記錄(기록)은 찾아 볼 길이 없다. 앞으로 硏究(연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雁門(안문)--중국 山西城에 있는 높은 산에 뚫려있는 구멍을 이른 말로. 그 산이 너무 높아 서 북쪽으로 가는 기러기가 넘지 못 하기 때문에 구멍을 뚫어서 길로 삼았다는 傳說이 있는 險地다. 皇室에서 追放되어 生存을 위한 避難處로 擇한 곳이었던 땅으로 現在도 數萬世帶 單位의 魚氏 集姓村이 있다고 傳한다.
馮翊(풍익)--우리 咸從魚氏가 高麗로 渡來하기 以前에 世居하던 곳으로 알려 저 있는 곳으 로서 現在는 地名이 바뀌어 大力縣이며 지금도 大規模 魚氏 集姓村이 散在해 있으며 現在 大力縣에 居住하고 있는 魚氏들에게 “이곳에 定着하기 以前에는 어디에서 이곳으 로 移住해 왔는가?“ 물으면 한결같은 말로 ”山西省의 大樹下“ 라고 證言한다.
위의글은 中國上古史. 中國歷代政權情報表. 이야기中國史. 十八史略. 司馬遷의史記中 五帝本紀. 殷本紀. 宋微子世家 中國通史 等 記錄을 參考하였으며. 이 글의 責任을 지기 위해 쓴 사람의 實名을 밝힌다.
始祖로부러 32世孫인 魚潤慶 合掌.